'랜덤' 은 게임을 다양하게 만드는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플레이어의 경험 확대와 몰입을 위해  꼭 필요하다. 게임에 하나의 '메타'라고 하는 주류 법칙이 형성되면 플레이어는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다양성을 잃고 획일화된 게임은 플레이어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플레이어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다음을 궁금해한다. '뻔하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음 행동에 몰입할 수 있는 재미가 있어야한다. 그 역할 하는 것이 '랜덤'이다.

예를 들어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의 체력이 100이고, 내 무기 공격력은 50이라 정해보자.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2번만 때리면 된다. 플레이어가 마주하게 될 몬스터는 모두 2번의 공격으로 고정된다. 이렇게 변수 없이 전투가 고정되고 반복된다면 플레이어는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그래서 약간의 변수를 추가한다. 등장하는 몬스터는 '90 ~ 110' 사이 무작위 체력을 갖고, 내  무기 공격력도 '50~60' 무작위 피해를 주도록 바꾼다. 이제 전투는 2번의 공격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체력이 110인 몬스터를 마주친다면 3번 공격해야 하는 변수가 생긴다. 플레이어의 첫 공격에 54, 두 번째 공격에 55의 데미지가 들어간다면(합쳐서 109) 몬스터의 체력은 1이 남는다. 이제 고정된 전투는 없다. 플레이어는 체력이 90인 몬스터가 나오길, 그리고 내 공격은 60이 뜨길 기대한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플레이어 기억에는 '데미지 60'이 없다. 오직 '불쾌한 체력1' 이 남는다. 뭔가 불합리하다고 느낀다. '아니 나는 무조건 2번은 때려야 되네, 운이 나쁘면 3번이고' 이런 생각이 든다. 3번 공격해야 하는 상황, 몬스터의 체력이 1, 2 정도 남는 상황이 다섯 번 연속됐다고 해보자. 이 정도면 '아 운이 더럽게 없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부정적인 감정이 최대치에 달한다. 이 게임은 점점 '망겜'이 된다.

그래서 플레이어의 부정적인 감정을 달랠 변수를 하나 추가한다.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한방컷' 낼 수 있는 변수 '치명타'다. 이제 일정 확률로 발동되는 치명타 공격은 적을 한 번에 없앨 수 있다.

내 공격이 치명타로 들어가면 짜릿하다.
내 공격이 치명타로 들어가면 짜릿하다.
물론 치명타로 얻어맞을 수도 있다.
물론 치명타로 얻어맞을 수도 있다.
"아니 이게 왜 빗나가"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내 공격이 빗나갈 수 있다'의 변수를 아예 배제한다. 그래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한다.
"아니 이게 왜 빗나가"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내 공격이 빗나갈 수 있다'의 변수를 아예 배제한다. 그래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한다.

이렇게 다양한 변수를 추가하면 고정된 전투는 사라진다. 전투는 운 좋으면 1번, 운이 나쁘다면 3번 형태로 바뀐다. 여기에 회피, 피해 감소, 같은 다양한 변수를 집어넣으면 플레이어는 더 다양한 형태의 전투를 기대할 수 있다.

단순한 예시지만 '랜덤'은 변수를 복잡하게 얽어서 게임을 더 다양하게 만든다. 예측할 수 없는 것에서 플레이어는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변수를 조절하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생각하며 게임에 더 몰입한다.

이 무작위의 변수를 가장 잘 활용한 장르가 '운빨망겜'으로 불리는 TCG다. (하스스톤)
이 무작위의 변수를 가장 잘 활용한 장르가 '운빨망겜'으로 불리는 TCG다. (하스스톤)
(Slay the spire)
(Slay the spire)
(Inscryption)
(Inscryption)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는 것이 이 장르의 핵심이다. '무작위'의 대상에 따라 불리한 게임도 한 번에 역전할 수 있다.

0과 100을 제외한 모든 확률은 50이다.

'엑스컴' 시리즈를 플레이해본 게이머라면 '!감나빗'에 폭발적인 분노를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코앞에 있는 외계인의 얼굴에 총을 겨누고 사격하는데도, 심지어 명중률이 99%인데도 공격이 빗나간다. 플레이어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이 부정적인 기억을 게임 내내 기억한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운이 좋았던 경우는 그냥 넘긴다.

5%의 확률로 치명타 공격이 성공하면 '역시 나야. 그래 이래야지' 라고 생각하며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적에게 50% 확률로 치명타 공격을 받을 경우엔 '아니 이게 맞네' 라며 분노 섞인 단어를 뱉는다.

이게 안맞네
이게 안맞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gP5cAM1PJ9s)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gP5cAM1PJ9s)

게이머들은 확률을 수학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은 선택적인 기억이 지배한다. 예를 들어,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5번 연속으로 나왔다고 해보자. 이때부터 동전의 뒷면이 나올 확률은 무조건 100%다. 그래야만 한다. 이번에도 앞면이 나온다면, 그것은 게임이 잘못된 것이다. 게임 자체의 버그거나 확률 조작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확률은 100으로 수렴할 뿐인데도, 게이머는 무조건 100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대로 두면 게이머는 운이 나빴던 상황만 기억할 것이다. 개발자도 억울하다. '확률'에 맡겼을 뿐인데 게임은 점점 '운빨 망겜'이 된다. 그렇다면 랜덤, 확률을 어떻게 사용해야할까?


도박사가 믿는대로

슬롯머신은 완전 '무작위'가 아니다. 일정 수준의 '회수율'이 정해져있다. 한 기계를 오래 붙잡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슬롯머신은 완전 '무작위'가 아니다. 일정 수준의 '회수율'이 정해져있다. 한 기계를 오래 붙잡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당첨될 확률이 1%인 슬롯머신이 있다. 
이 슬롯머신을 100번 연속 돌렸을 때, 한 번 이상 당첨될 확률은
약 63%다.

강화 콘텐츠가 있는 게임에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있다. 

 

1. 내가 하는 게임에서 장비 강화가 성공할 확률은 10%다.
2. 당연히 강화는 첫 시도에 바로 성공하지 않을 것이다. 
3. 정말로 운이 좋아서 빠르게 성공한다고 해도 7번째, 8번째 정도쯤일 것이다.
4. 그러니 초반에는 강화에 실패해도 괜찮은 아이템을 제물로 바친다.
5. 이렇게 제물을 바쳤으니 강화에 성공할 확률은 더 높아졌다.

 

게이머들은 미신에 불과한 의식을 거행한다. 강화 성공 확률이 1%라면, 적어도 90개의 제물은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100번째에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뽑기의 경우도 비슷하다. 게이머에게 1%란 '100번을 뽑았을 경우 무조건 1번은 나온다'를 의미한다. 그것이 게이머들의 생각이다. 게이머는 납득할 수 없다. '아니, 이 정도 했는데도 안 나와? 버그가 아니면 게임사가 확률 장난을 치고 있을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정성이 부족하면 이렇게 된다.
제물을 바치는 정성이 부족하면 이렇게 된다.

'도박사의 오류'다. 게임 설계에서는 '도박사의 오류'를 잘 조절해야한다. 이 '오류'가 바로 게이머들이 받아들이는 '랜덤'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정해진 무작위, 때가 되면 나오는 무작위'란 뜻이다. 게임에 적용하는 랜덤을 꼭 수학의 법칙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게임의 목적은 즐거움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대놓고 보정할 수는 없다. 플레이어에게 유리하도록 보정한다는 건 결국, 그 의도가 어떻든 '개입'을 한다는 뜻이다. 게이머의 즐거움을 위해 선의의 개입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속임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후 이 게임은 조금만 잘못해도 게이머로부터 신뢰를 완전히 잃는다. 특히 하드코어 게이머들, 충성도가 높은 게이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불공평한(사실은 공평하지만) 확률'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도 많다. 1%의 '!감나빗'을 인내해가면서, 그 고통을 꾸역꾸역 즐기는 게이머들에게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된다.

사실 '엑스컴 2'는 특정 난이도를 제외하면, 전투마다 보이지 않는 '보정'을 적용한다. 그것도 플레이어들이 유리한 쪽이다. 정말로 확률 그대로를 적용한 채 내버려 둔다면, 플레이어의 몰입과 즐거움 요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개발사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플레이어들이 1%의 '빗나감!'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엑스컴이라는 게임에서 공격 한번이 정말로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게이머가 이 부정적인  상황만을 기억하고, 이를 토대로 게임을 평가한다.

엑스컴2에 대한 게이머들의 '극찬'이 가득하다

천장의 함정

무작위로 인한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은 '파밍'이다. '최고의 장비'를 통해 '최소의 변수'를 만드는 것이다.
확률을 극복하는 것은 근성이다.

국산 모바일 수집형 RPG에 돈을 써본 게이머라면 '더럽게 안 나오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게 된다. 개발사는 이런 게이머들의 불만을 달랠 방법이 필요하다. 게이머들이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고, 게임사 역시 조금 양보하면서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 있다. '천장'이다. 

게임에서의 '천장'은 '당신의 성의와 노력(현질)에 보답하고자 확정으로 하나를 드립니다.'를 뜻한다. 플레이어의 기억에 쌓여가는 부정적인 감정을 포인트, 마일리지, VIP시스템으로 바꾸는 시스템이다. '100만 원을 지르시면 확정으로 SSR급을 하나 드립니다!'라며, 게이머들의 노력과 소비에 대한 보상을 보장한다.

물론 이 천장은 '일반적인 유저'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선수'들, '진심'을 다하는 게이머들을 위한 '그들만의 시스템'에 가깝다. 이 '진심 모드' 게이머들의 완급조절과 과정에서 얻는 부정적인 감정과 분노를 달래는 역할, 그리고 소중한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한 게임사들의 최소한의 성의와 노력이다. 철저히 수학의 영역에 있던 '무작위'가 게이머들을 위해 조금씩 바뀐다.

국산 모바일 수집형 RPG의 핵심은 '돈=실력=운'  이다.
국산 모바일 수집형 RPG의 핵심은 '돈=실력=운'  이다.
게이머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달래주는 VIP 시스템
게이머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달래주는 VIP 시스템

겉은 굉장히 친절한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기엔 또 다른 함정이 숨어있다.

'100만 원을 지르시면 확정으로 원하는 SSS급 캐릭터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일단 처음이시니까 30만 원만큼 천장 포인트를 채워 드릴게요. 이제 70만 원만 더 지르시면 원하는 캐릭터를 확정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게이머는 70만 원을 채우면 된다. 시작부터 30만 원을 이득을 본 느낌이다. 일단 가볍게 10만 원 질러본다. 당연히 SSS급 캐릭터는 나오지 않는다. '아쉬운데 한 번만 더 해보자' 하는 마음에 10만 원을 또 지른다. 처음에 받은 30만 원과 방금 쓴 20만 원. 벌써 천장의 반이 채워졌다.

'마지막, 진짜 마지막' 하다가 어느덧 50만 원이나 썼다. 시작할 때 받은 30만 원을 합치면 총 80만 원. 앞으로 20만 원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어차피 다음 달에도 이 게임 할 거니까. 일단 원하는 것 캐릭터 하나는 얻으니까 이번에 다 채워서 얻고 시작하자' 이 과정이 게이머들을 '매몰비용'의 늪으로 끌어들이는 천장 시스템이다.


안 나와도 너무 안 나오는데?

그래도 의문이 생긴다. 천장이 있다고는 해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확률상으로는 50만 원 썼을 때 나오는 게 맞는데?' 그래서 게이머들은 직접 통계를 낸다. 그리고 게임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거 일부러 천장 채우게 만들려고 확률을 낮춘 거 아니야?'

게임사는 지금까지 '도박사의 오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들여다보니 애초에 '도박사의 오류'를 적용해준다고 해도  1,000번, 10,000번을 뽑아야 나올 확률로 설정해놓았다. 1%가 아니라 0.001%였다. 쉽게 얻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게이머들은 분노했다.

게이머의 재미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하나의 배려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배려 때문에 누군가는 게임을 떠날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의도적인 확률 개입, 그것도 극단적으로 게임사에 유리하도록 확률을 보정한 결과는 비난받고 사회적 문제로 이어진다.

(출처: http://ccej.or.kr/75009)

순수 피지컬 VS 운빨

'랜덤'은 게임을 더 다양하게 만들지만, 잘못 사용하면 개발사와 게이머 양쪽 모두 스트레스가 된다. 이럴 경우에는 아예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의외로 이런 '정해진' 형태의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도 있다.

 

게임에 랜덤, 확률, 변수 같은 것을 더하지 않고, 오히려 빼는 형태다.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그대로 고정하고,  치명타나 회피같은 요소도 정해진 조건에서만 발생하도록 설계한다. 이렇게 변수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신 '순수 피지컬'을 요구하는 장르가 바로 '소울류'다. 

 

'알면 피하고, 모르면 맞는다.' 의 담백한 규칙. 알때까지 몇번이나 겪어야 하는 죽음은 고통이다. 단조롭고, 지루하다. 하지만, 무작위 요소가 거의 없는 만큼 '알기만 한다면'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더 가치가 있다. 

마지막 보스전. 치열한 전투 이후 서로 공격 한번씩 남겨둔 상황.
내 체력은 10. 보스의 공격력은 20. 하지만 내가 찬 목걸이는 30%의 확률로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살았다. 내 공격력은 20 보스의 체력은 30. 하지만 이 공격이 치명타로 들어가면서 보스를 잡았다.

드디어 깼다. 3번 만에 앤딩을 봤다.

마지막 보스전. 치열한 전투 이후 서로 공격 한 번씩 남겨둔 상황.
내 체력은 10. 보스의 공격력은 20. 애초에 아이템 없이 깨는 게 목표다.

보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처음부터 다시 간다. 50번째다.

무작위와 확률의 개입이 적은 플레이, 고통스러운 플레이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도 있다. 
무작위와 확률의 개입이 적은 플레이, 고통스러운 플레이을 즐기는 하드코어 게이머도 있다. 

게임은 '재미'를 추구한다. 게임에서 '랜덤' 메커니즘은 변수를 통해 게이머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극적인 조합으로 플레이어가 '잊을수 없는 경험'을 만든다면 더 좋다. 소위 게이머들이 이야기하는 '운빨 뽕맛'을 선물하는 역할이 바로 '랜덤'이다.

게이미피케이션에서 활용되는 '랜덤'도 비슷하다. 게이미피케이션의 목적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거나 하기 어려운 것에 관심을 두게 만들고, 동기를 부여하고, 또 지속해서 행동할 수 있도록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의 '랜덤'은 '보이지 않는 조력자'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왜곡된, 하지만 선한 의도를 담은 '유리한 무작위성'이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꼭 엄격한 수학의 규칙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