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했더니 '혹시나'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를 가져본다. 하지만 또 속는다. 알면서도 속고 그러면서 다시 기대한다. 게임 메커니즘 '랜덤'을 받아들이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다. 게임에서 사용되는 랜덤은 '속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다'를 노린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기대가 계속 실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일종의 손해와 같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플레이어는 랜덤의 굴레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랜덤의 저울 양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번엔 되겠지, 주인공은 나겠지'의 '기대감'과 '아니 이게 안 된다고? 또 안됐어?'의 '실망감'이다. 기대감은 이익으로 이어지고, 반대쪽에 있는 실망감은 손해가 된다.

저울이 어디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플레이어의 행동은 다르게 변한다. 결과에 따라 플레이어는 행복을 느끼거나, 혹은 실망을 받아들이거나, 다시 한번 속을 준비를 하거나, 더 이상의 행동을 포기한다. 

게임에서 랜덤, 특히 보상과 연관된 랜덤은 플레이어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손해를 본 경험으로 인해 얻게 될 가치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 오른다.

'이번에는 운이 안 좋았네. 한 번 더 간다. 제발 나와라.'

 


궁금하면 까봐야지

플레이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음표는 고전게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있다. (Ponpoko/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랜덤은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가보고, 상대방의 패가 궁금하면 올인으로 베팅하고, 물음표에 뭐가 들어있는지 까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심리에 닿아 있다.

'기대'와 '호기심'을 가장 강렬하게 이용하는 것은 '슬롯머신'이다. 궁금함과 기대감이 뒤섞이면 플레이어의 합리적 판단은 흐려진다. 최근 모바일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랜덤 박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는 카지노에 가서 슬롯머신을 당길 필요 없이 휴대폰에서 터치하는 것으로도 이 욕망을 채울 수 있다. 

슬롯머신에는 '기대와 실망' '가치와 손실' '당첨과 꽝' 두 가지 축이 담겨있다. 기대-실망-기대-실망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루프가 계속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이지 못한 이 루프를 플레이어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언젠가 나올 것이라는 희망'과 '바로 지금이고, 주인공은 나다'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게임 디자이너들은 랜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견고한 축을 뒤흔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루프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빠져들게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50%확률로 10억 vs 100% 확률로 1억
50%확률로 100억 vs 100%확률로 10억

플레이어는 손실을 최소화길 원하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최고이길 바란다. 위험한 선택과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려 한다.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원하지 않는다.

게임에서는 랜덤을 통해 플레이어의 '합리적인 마음'을 뒤흔든다. 게이머들은 그것이 위험한 선택이고, 충분히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불확실성을 선택한다. '그래도 뭔가' 나오기 때문이다. 

'랜덤 박스' 대부분이 이렇다. 비어있는 박스는 없다. 일단 게이머들이 뭐가 됐든 얻을 수 있는 것이 들어있다. 다만, 플레이어들은 그걸 '폐지'라고 부를 뿐이다.

카카오게임즈 '우마무스메'
NC소프트 '리니지 W'

'랜덤 박스'에는 일반, 희귀, 전설 아이템이 함께 들어있다. 플레이어의 목적은 전설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 아이템이 나오지 못하도록 일반, 희귀 아이템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일반 아이템은 그냥 상점에 팔거나, 갈아버리고 가루를 만드는 용도의 '폐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폐지'를 모으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 이 사소한 경험이 게이머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실망으로 인해 느낄 플레이어의 손실을 조금씩 달래가면서, 루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수많은 실망과 좌절 끝에 마주하는 단 한 번의 '득템'은 잊을 수 없다. 실망과 손해를 토대로 피어난 기쁨과 놀라움은 극대화된다.

물론 플레이어마다 얼마까지 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지, 랜덤에 대한 막연한 실망의 루프를 언제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효용치'는 각각 다르다. 결국,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언제까지 기대할 것인지'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 플레이어의 행동은 바뀐다. 아무리 값진 이득이라고 해도 예상되는 손실이 막대하다면 플레이어들은 랜덤을 회피한다. 

'뭔가는 나온다' 의 기대감. '뭐가 나올까?'의 호기심. 이 두 가지 원초적인 본능 때문에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상품이 들어있는지 보이지 않는' 조건이 오히려 더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한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하지만 또 기대를 한다. (디아블로 이모탈 눈송이 이벤트)

경험은 가치 있어야 하고, 보상은 최고여야 한다.

간혹 게임 아이템이 억대에 거래됐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데이터 쪼가리일 뿐인 아이템이 고가에 거래되는 이유는 '희소성' 때문이다. 그것이 쉽게 구할 수 없고, 쉽게 제작할 수 없고, 특정 그룹이나 커뮤니티에서 희귀한 것일수록 그 가치는 더 오른다. '리니지 집행검' '유희왕 카드'는 이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쓸모없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 아이템을 가진 것만으로도 큰 주목을 받을 수 있다. 

플레이어는 수많은 랜덤 확률을 뚫고, 자신의 시간과 돈, 노력 인생을 쏟아부은 이 결과물을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 지금까지 이 결과물을 위해 참여했던 랜덤보다 10배, 20배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 감정은 이스라엘의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두 체계에 의해 반영된다. 플레이어는 랜덤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비용을 지불하는 '활성 시스템'을 따르는 상태다. 하지만 다른 쪽에 있는 '백업 시스템'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가치를 유지하고 보존하려 한다. 

'활성 시스템'과 '백업 시스템'의 충돌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손해라고 여기지 않는다. 랜덤 메커니즘이 손실과 피해의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동기부여로 바꾸고, 그 가치를 더 크게 여기도록 바꾼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아이템 획득 확률이 더 낮을수록 소유했을 때의 가치가 더 크다고 여긴다.

소수점 4자리 5자리는 돼야 '뽑기'라고 할 수 있다. 안 나와도 문제지만, 쉽게 나오면 더 문제다.
소수점 4자리 5자리는 돼야 '뽑기'라고 할 수 있다. 안 나와도 문제지만, 쉽게 나오면 더 문제다.

남들 다 하는데 너는 안 해?

그 제품이나 서비스, 대상에 따라 희소성은 다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손실을 완전히 들어내는 것이다. 최근 래플(Raffle), 드로우(Draw) 같은 일종의 무작위 추첨제도가 이런 방식을 활용한다. FOMO(Fear Of Missing Out), '남들 다하는데 너는 안 해? 남들은 다 가졌는데 너만 없어. 이 기회를 놓칠 거야?'의 감정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자극한다.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는 플레이어가 랜덤에 참여하도록 동기부여를 일으킨다. 더군다나 래플, 드로우에는 손실 위험도 없다. 단지 쉽게 구할 수 없고, 선택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일단 참여는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선택을 받는 것 자체에 엄청난 가치와 희소성 그리고 관심을 부여한다. 

'남들 다 참여하는 거 봤지?'는 '너 당첨됐는데도 안 살 거야? 남들은 못 구해서 난린데?'로 이어진다.

플레이스테이션 5 래플 이벤트(출처: 예판넷)
'명품 드로우'의 다른 말은 '서버 다운' 이다.
'명품 드로우'의 다른 말은 '서버 다운' 이다.
회소성은 '수량' '시간' '자격' 등에 제한을 두는 방법으로 부여할 수도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15주년 한정 소장판)
회소성은 '수량' '시간' '자격' 등에 제한을 두는 방법으로 부여할 수도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15주년 한정 소장판)
같은 랜덤이라고 해도 희소성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포켓몬 띠부띠부씰. 출처: 차취생 살아남기)
같은 랜덤이라고 해도 희소성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포켓몬 띠부띠부씰. 출처: 차취생 살아남기)

컨빨 vs 운빨

랜덤은 게임 플레이를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만들어 플레이어의 몰입을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런 제한 없이 적용하면 플레이어에게 부정적인 경험을 줄 수도 있다. 플레이어는 늘 좋은 선택,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좋은 경험을 위해 원인, 과정, 결과에 따른 '통제'가 필요하다. 게임마다 랜덤을 통제하고 활용하는 방법은 다르다.

 

랜덤 요소가 거의 없는 게임은 'e스포츠' 종목으로 선정된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순수 피지컬을 요구하는 'RTS'나 'FPS', 'MOBA' 장르의 게임에서는 랜덤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플레이어의 역량에 따라서 그 원인과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

변수가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마인 대박'이나 '언덕 판정', '치명타 확률'과 같은 랜덤 변수가 존재하지만, 역량에 따라 그 변수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변수가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마인 대박'이나 '언덕 판정', '치명타 확률'과 같은 랜덤 변수가 존재하지만, 역량에 따라 그 변수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1, 2의 지뢰)

 

원인은 통제할 수 있지만, 결과는 통제할 수 없는 형태는 '강화' 시스템이다. 더 좋은 등급의 아이템, 더 많은 아이템을 소모할 수록 강화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대부분의 모바일 RPG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확률에 따른 결과는 플레이어마다 다르다.

재료 아이템이 많을 수록 강화 확률이 오른다. (넥슨 '던전앤파이터' / 펄어비스 '검은사막')
재료 아이템이 많을 수록 강화 확률이 오른다. (넥슨 '던전앤파이터' / 펄어비스 '검은사막')
뛰어난 전투원 + 지형을 활용한 근접공격 = 명중률 99%. 이렇게 공격 확률을 높일 순 있겠지만, 그 결과는 '감나빗!'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XCOM2)
뛰어난 전투원 + 지형을 활용한 근접공격 = 명중률 99%. 이렇게 공격 확률을 높일 순 있겠지만, 그 결과는 '감나빗!'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XCOM2)

 

원인을 통제할 수 없지만,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캐쥬얼 게임에서 많이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테트리스나 뿌요뿌요 같은 블록 게임이다. 어떤 블록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플레이어가 이 블록을 어떻게 쌓는지에 따라 게임은 달라진다.

'어디에, 어떻게'가 중요하다. (테트리스 VS 뿌요뿌요)
'어디에, 어떻게'가 중요하다. (테트리스 VS 뿌요뿌요)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의 난투는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무작위로 선택된 영웅을 고르는 규칙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플레이어가 생각한 '무작위'의 범주에서 벗어난 선택지가 나오기도 한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의 난투는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무작위로 선택된 영웅을 고르는 규칙이 있다. 하지만 가끔은 플레이어가 생각한 '무작위'의 범주에서 벗어난 선택지가 나오기도 한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원인 과정 결과 모두 통제할 수 없는 랜덤은 도박이다. 한국의 모바일 확률형 아이템이나 카지노의 슬롯머신 혹은 뽑기 이벤트 같은 것이 그렇다. 이런 랜덤에 플레이어들이 보이는 반응은 '기도 메타' 혹은 '제물 의식'이 있다.


제가 원한 랜덤은 이게 아닌데요?

매월 다른 과자를 구독할 수 있는 '월간 과-자' (롯데제과)
매월 다른 과자를 구독할 수 있는 '월간 과-자' (롯데제과)
(술담화)
(술담화)

"제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요"

랜덤으로 인한 부정적인 경험은 최소화 해야한다. '운빨망겜 더러워서 떄려친다' 같은 부정적인 경험이 싹트지 않도록 랜덤을 통제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플레이어가 심리적으로 랜덤의 원인과 결과를 수용하고 회복할 수 있는 경계선을 설정해야 한다. 

최근에는 게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랜덤 요소가 적용되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도서, 꽃, 간식 등 다양한 형태의 '랜덤 구독'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제한되지 않은 랜덤으로 인해 실망과 분노의 사례도 나오고 있다. 한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이 됐었던 '랜덤 메뉴'가 가장 대표적이다.

플레이어 경험의 폭을 고려하지 않고, 손실과 기대의 조율에 실패한다면 랜덤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통제가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적당히'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적당히'에서 벗어나 선을 넘는 순간, 감당할 수 있는 손실의 저울이 기울어지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의심하고 분노한다.

환불X, 교환X
환불X, 교환X

랜덤은 단순히 '확률에 의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상이 되는 플레이어들이 랜덤을 통해 기대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랜덤은 보이지 않는 통제와 조율이 필요하다. 

긍정과 부정의 저울이 한쪽으로 급격하게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티 나서도 안 된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 기대감으로 재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플레이어가 생각하는 랜덤이다. 

주사위는 가끔 혹은 중요할 때 내 편이어야 한다.


참고문헌

윤진헌·임혜빈·이병관. (2020). 소비자의 의사결정 방식이 랜덤박스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 긍정적 불확실성과 위험성 평가를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소비자·광고, 21(1), 109-135.

 

Daniel Griffin·Albert van der Meer, Press Start: Using gamification to power-up your marketing (London, 2020), pp.145-154

 

석주원, "랜덤의 미래" 게임화저널, 2022년 7월 15일, http://www.gami-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