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왜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그것과 바꾸겠다. (I would trade all of my technology for an afternoon with Socrates.)"고 했을까? 또, 아이패드와 아이폰4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애플은 기술과 인문학의 중간에 있다’고 말한 그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한편으론 괴팍한 인성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일관된 갑질로도 유명한 그에게 인문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국내적으로는 2016년 다보스 포럼에서의 4차 산업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by Klaus Schwab) 선언에 이은 이세돌의 알파고 대국 패배, 코로나19가 몰고 온 뉴 노멀식의 카오스가 그 이전부터 이 땅에 불어오던 인문학 열풍과 뒤섞여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시야를 점점 더 혼미하게 한다. 세계적으로는 팬데믹의 후유증으로 경제 악화에 처한 모든 나라들이 일제히 빗장을 걸어 잠그는 각자도생의 와중임에도 케이팝이나 프로 게이머 등을 필두로 번지기 시작한 한류의 파고가 점점 더 거세지는 까닭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글은 정보 혁명으로 상징되는 퍼스널 컴퓨터의 출현과 더불어 등장한 게임이 단순한 오락 기능을 넘어 경제, 경영, 인사, 행정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게임화를 수용하는 진화에 대한 이유를 일과 배움과 놀이라는 인간 본연의 삶의 영역에서 추론하고 게임화에 대한 인문학적 토대를 더듬어 보려는 것이다.
이는 미래 변화의 원동력인 게임화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고 점차 세분화하는 세대 간의 시각을 좁혀 코로나 이후 본격화하는 4차 산업 혁명의 변화에 발전적으로 기여하는 게임화 문해력(Gamification Literacy)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이다.
해체되는 삶
유사이래 농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삶은 일과 배움과 놀이가 본래 하나였다. 동굴에서 밤을 지내고 사냥을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 아들에게 그 외출은 먹거리를 얻기 위한 일이며 방법을 익히는 배움인 동시에 다소의 긴장이 따르는 신나는 놀이가 아닐 수 없다.
농경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집안 일에 동원되면서 일을 배우고 익히며 농부가, 모심기 같은 노동요를 따라 흥얼거린다. 이 시기에는 일과 배움과 놀이가 하나인 동시에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남자라면 의례히 사냥에서 집짓기, 새끼꼬아 이엉얹기, 가마니 짜기와 일체의 농작물을 재배, 관리할 줄 알았고 여성들 또한 옷감과 음식을 만들 줄 알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던 시절이다. 노동집약적 시대로 집에 자녀가 여럿 있으면 그 중에는 부지런한 자식도, 다소 게으른 자식도 있었지만 게으르다고 해서 밥을 굶기거나 내쫓지는 않았다. 고용과 실업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기계의 발명으로 비롯된 산업 혁명은 이전까지의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산업 사회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는 오로지 대량 생산한 재화를 대량 소비시키기 위한 ‘대중화(Maasification)’에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몰려드는 인구는 공장과 학교 두 곳에 집중되었다. 단순화, 표준화, 전문화를 기치로 하는 3S(Simplification, Standardization, Specialization)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규모의 경제(Scale of Economy)가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테일러리즘(Taylorism)이나 포디즘(Fordism) 혹은 시간 연구(Time Study), 동작 연구(Motion Study)등으로 상징되는 생산성 추구는 자연스럽게 놀이의 영역을 배제시켰다. 이후에 등장한 오락(recreation)은 말 그대로 생산을 위한 하위 수단이나 개념에 불과했다.
이렇듯이 산업사회 이후 대량화에 의한 생산성 향상 과정에서 삶은 오로지 일과 배움으로 양분되고, 배움은 일을 위한 수단으로 일은 하기 싫은 노동으로 전락하고 놀이는 실종되었다. 놀이가 사라지고 생산과 소비, 고용과 실업으로 양분되면서 자연과 환경은 훼손되고 금전 만능주의로 인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는 몰락하였다. 불특정 다수로 묶이는 대중은 개인의 정체성을 박탈당했으며 끝없는 분업화는 마침내 가치 실종을 넘어 생명 상실의 수준에까지 이른다. 끝없는 분업 과정은 드디어 살해의 지경에까지 치닫는다.
근자에 들어 극단적 이기주의와 반 인륜적 폐해가 만연해지는 이유는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서 인문학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원형으로의 회귀
90년대말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오랜 기간동안 실업률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정규직의 문은 점점 더 좁아지는 한편, 긱 경제, N잡러 같은 용어들은 점점 더 일반화하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는 점차 심화되면서 소위 ‘인국공(인천 국제 공항 공사)’사태로 상징되는 이들 사이의 공정 시비는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제 불황과 경기 침체 상황에서도 기본 소득제나 자율 근무제 등에 관한 논의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초기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대형 플랫폼에 대한 공유 경제의 오해도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는 조짐이다.
이런 일련의 변화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흐름의 끝은 어디를 지향할까? 결론을 앞당기면 원형 곧, 산업 사회 이전으로의 삶의 가치 회복이다. 80억 가까운 지구촌 인구가 8천 혹은 8억 수준의 수렵이나 농업사회 생활을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2년이 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세계 유동 인구가 1/100로 줄어든 하늘은 마치 1960~70년대의 가을을 연상케 한다. 비록 강요된 멈춤이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성찰은 잃었던 혹은 놓쳤던 기억과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이 땅에 아직 농업 사회를 기억하는 세대가 멸종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기억 속에 어렴풋이나마 이웃, 관계, 나눔, 배려 등의 가치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기억은 산업 사회를 거치는 동안 분업과 분해로 인하여 없어지고, 그래서 유실했던 조각들이다.
후기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기술적으로 통합, 융합, 통섭이 가능해지고 있다. 네트워크화다. 사회적 기업이나 마을 공동체처럼 사회적으로도 연대가 형성되는 조짐이다. 관계의 회복은 그 사이의 나눔과 배려를 수반한다. 공감, 공유, 공정 등에 관한 논의가 잦아지는 까닭이다. 이와 함께 우리의 삶도 생산과 소비의 구분을 약화시키는 프로슈머의 등장을, 고용과 실업을 교차시키는 긱(Gig Economy) 경제 현상을 확장해 가고 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한 강요된 앞당김이지만 재택에 의한 일과 배움이 한 공간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놀이가 게임화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렇듯 조직화(네트워크)를 회복해 가는 이면에 불특정 다수로부터 특정화된 개인으로의 정체성 회복 노력이 발아하고 있다. 최근에 주목을 끄는 일련의 책들에서는 이러한 탈대량화 (Demassification)경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물리적 삶의 방식은 디지털로 치환될 수 있다. 4차 산업 혁명을 상징하는 인공 지능이나 로봇, 빅 데이터 기술 등은 과거 사람의 기억과 손발에 의존하던 시절, 그 이상을 처리해 낸다. 앞으로 5차, 6차 혁명을 기대하면 100억 인구의 생활 시스템이 1억 시대처럼 돌아가지 못할거란 법이 없다. 문제는 그 때의 삶의 가치와 질서, 배려와 돌봄의 상식으로 회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겉으로는 아수라판 같은 우리 현실의 저변에 미약하게나마 불어오기 시작하는 인문학의 바람이 희망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은 불과 얼마 전에 3만 불을 넘겼다. 이스터린의 역설(Easterlin's Paradox)이 말해 주듯 우리는 아직 이웃과 진정성 있는 공감(Empathy)을 나누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북구 유럽의 나라들이 보여주듯이 아직 국가간, 대륙간 편차는 크지만 종국에는 사회적 가치 공유에 의한 원형으로의 회귀 가능성을 불어오는 인문학의 미풍에서 감지하는 것이다.
2차, 3차 산업 혁명을 거쳐오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던 직업, 취업, 창업 등 일에 대한 방식과 개념의 진화 그리고 평생, 원격, 자기 주도, 비대면 등을 거치면서 발전해 온 배움의 발전 과정이 4차 산업 혁명의 열풍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충격으로 그 지향점이 한층 더 뚜렷해졌다. 원형으로의 회귀다. 응당 그 원형은 일과 배움과 놀이가 한데 아우러진 삶을 의미한다. 게임화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에필로그
한국게임화연구원이 국내 서비스를 하고 있는 벤치마크게임즈 솔루션을 15세의 중3 남학생과 은퇴한 67세의 교수가 각각 플레이 해보았다. 리더십, 동기 부여, 소통, 갈등 관리 등 조직 구성원으로서 요구되는 자질을 평가하는 게임이다. 결과는 회사에 대한 이해가 1도 없는 중학생이 기업 20년, 마케팅 전공 교수 20년 도합 40년의 경력자인 교수를 모든 분야에서 앞질렀다. 물론, 메뉴얼은 점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디지털 전환기(Digital Transformation)에 놓인 오늘을 고려할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본다.
게임화는 게임으로의 전환 과정 혹은 절차적 의미를 포괄한다. 앞서 논의한 대로 4차 산업 혁명 이후의 사회는 원형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엄청난 문명의 발달과 폭발적인 지구촌 인구수는 결코 이전의 농업 사회나 원시 사회의 삶을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의 방식은 당시의 가치관을 지향한다. 이 과정에서 일과 배움이 적절하게 융합하기 위해서는 촉매제로서 놀이의 정당한 개입이 필연적이다.
문제는 앞서 두 세대의 게임 결과가 시사하듯 그 개입 시점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분기점이라는 공교로움이다. 게임에 빠지는 청소년과 이를 죽도록 말리는 부모 세대의 충돌점이기도 하다. 인공 지능이나 로봇, 빅데이터 등의 기술은 인간의 예술성이나 창의성을 앞지를 전망이다. 그러나 강한 인공 지능 시대가 오더라도 결코 앞설 수 없는 건 인간 고유의 속성, 곧 인성이다. 모두에서 밝혔듯이 이미 게임화는 경제, 경영, 행정, 교육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삶의 일부로서의 가치와 위상을 회복해 가고 있는 중이다. 게임화가 원형으로의 회귀를 위한 정당한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속성을 중심 한 인문학의 가치는 중요하다. 아마도 잡스가 소크라테스를 그리워한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김일철 회장은 현재 동의대학교 광고홍보학과 명예 교수이며, IMC(Integrated Marketing Communications)와 국제 광고, 국제PR 및 브랜드 등을 강의하고 있다. 교수 이전에는 LG전자 해외 마케팅부에서 국제 광고를 시작으로 타파웨어 코리아, 웅진, 렉솔 코리아 등 국내외 기업에서 20년 가까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과 기업 경영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IMC 적용 가능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한양대학교, 1998)를 받았다. JAR, IJA, EJM 등의 국제 및 국내 학술지에 20여 편의 논문을 게재하였으며 [IMC세미나](2003), [온광고론](2006) 등 8권의 저서·역서가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중국의 북경대학교와 심천대학교에서 방문, 초빙 및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2003년 이후 한국IMC 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시장과 매체 그리고 메시지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이론 및 개념화에 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 위에 실린 글은 게임화저널의 의견 및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영국의 게이미피케이션 매체 'Ludogogy'에 영문으로 송출되었습니다.
원문: https://ludogogy.co.uk/gamification-a-recovering-force-towards-the-archetype/
<저작권자 ⓒ Ludogogy (https://www.ludogogy.co.uk/)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게임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